[review]지워지는 존재를 지키고 싶어요

올리브

안녕하세요 독자님, 오늘은 다소 예민하면서도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써요. 지난달 화제였던 얼룩말 세로의 도심 활보, 기억하시나요? 온갖 자극적인 보도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세상인지라 어쩌면 벌써 잊혀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뒤늦게 이 얘기를 다시 꺼내려하는 이유는요, 지워져 가는 존재를 지키고 싶어서예요. 


마취총에 맞아 비틀대다 쓰러져 트럭 짐칸으로 옮겨지는, 세로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도 제 머릿속에 생생한데요. 이후 각종 SNS와 정치인의 입을 통해 덧씌워지는 세로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갑갑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어요. “세로야 나도 너처럼 자유를 찾아 떠날게”, “세로가 봄소풍을 나왔나 보네", “세로가 너무 불쌍한데 귀여워ㅠㅠㅋㅋ" 여기저기서 세로의 이름이 불리고 있는데, 점점 당사자는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세로의 고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 반항기 가득한 ‘탈ZOO’ 사건?

사진 : 트위터 갈무리(동영상 캡쳐)


세로는 그랜트얼룩말이에요. 케냐·탄자니아 등에 주로 분포하는 종으로, 최대 18명 무리 속에서 지내는 동물이죠.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따르면, 얼룩말은 양, 소, 돼지, 말 등과 달리 야생성이 강해 가축화하기 어려운 동물이라고 해요. 아무리 동물원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야생성은 남아 있을 테니, 세로에게 동물원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로가 반항심을 갖고 울타리를 부쉈다고 생각하는 건 섣부른 판단일 수 있어요. 동물원의 안전불감증과 열악한 서식 환경, 나아가 그런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인 허점도 있으니까요.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인 창경원이 생긴 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동물원 내 동물복지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어요. 동물원 관리는 지난 2016년 『동물원・수족관법』제정으로 비로소 국가의 관리 범주 내로 들어오게 됐지만, ‘동물복지’ 관련 규정은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죠. 


전국의 동물원 현황조사를 다룬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울타리를 제대로 갖춘 동물원이 열 곳 중 한 곳도 되지 않았는데요. 동물에게 꼭 필요한 방사장이나 은신처 같은 것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문제를 파보면 2017년 5월 동물원·수족관법이 시행됐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서식 환경이나 우리의 면적 등 제대로 된 관리 기준이 없을 때 실내동물원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지금까지도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거죠.


🤔 단단히 삐졌다, 외로워서 그랬다?

사진 : JTBC 뉴스 영상 캡처


“세로는 현재 가장 좋아하는 당근 간식도 거부한 채 실내 기둥에 머리로 부딪히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도심 활보 이후 세로의 근황을 살펴보았는데요. 좋아하는 간식을 거부한 채 기둥에 머리를 부딪히는 행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극심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보였거든요. 실제로 세로의 상태를 걱정하는 댓글들이 꽤 많이 보였는데,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세로가 ‘단단히 삐졌다'는 뉘앙스로 보도하는 점이 아쉬웠어요.


세로의 행동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북극곰 ‘통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요. 한국의 동물원에 북극곰이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2018년까지만 해도 사례가 있었어요. 통키는 1970년대에 지은 비좁은 실내 방사장에서 살아야 했고, 섭씨 34도의 폭염 속에서 방치되듯 살다 사망했는데요.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머리를 계속해서 흔드는 ‘정형 행동’을 자주 보였다고 해요. 


정형행동은 좁은 공간에 놓인 동물원 동물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보이는 행동인데요. 몸을 흔들거나 같은 자리에서 뱅뱅 돌기도 하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끊임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거나 심지어 자기 배설물까지 먹는 경우도 있어요. 


과연 세로는 외로워서, 단단히 삐져서 간식을 거부하고 실내 기둥에 머리를 “반복해서" 부딪히고 있는 걸까요?


🙄 동물원, 변하고는 있는데요...


오는 12월부터 동물원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는 등, 법과 제도가 변화하고 있긴 해요. 동물원, 수족관을 기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할 경우 동물에게 고통 주는 행위가 금지되며 고래류 전시, 동물카페 등이 금지되죠. 동물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식도 변화하고 있어요. 실제로 2018년 퓨마 뽀롱이의 사살은 전국적으로 큰 공분을 사며 국민청원까지 이어졌죠. 50여 건의 동물원 폐지 글이 올라왔고, 4만여 명이 서명했다고 해요. 


하지만 제가 느낀 문제는 동물을 대하는 미디어의 태도예요. 세로는 단순히 동물원을 탈출했던 한 명의 동물에서 나아가, 일종의 서사가 되고 있어요. 각종 언론과 매체에서 다루는 세로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스펙타클한데요.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거예요. 


‘엄마 아빠를 잃고 슬퍼하던 얼룩말 세로가 단단히 삐뚤어져 캥거루와 싸우고 탈출까지 감행, 붙잡혀 돌아와서도 삐진 게 풀리지 않아 사람들은 세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기로 함(..)’ 


순식간에 영화 한 편이 뚝딱 완성된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동물원 탈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미디어의 동물 의인화(“귀여워", “삐졌어"등)와 이야기 짓기는 자칫 부조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인식하기에 이야기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 결과가 세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합사로 그친다면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슬펐다”,“한창 사춘기일 나이, 반항심을 가지고 탈주했다"


얼룩말 세로와 관련된 영상이나 기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문구인데요. 수의사이자 곰보금자리프로젝트의 최태규 대표"동물에게 '싸웠다', '삐쳤다'는 등의 말은 잘못된 의인화의 예시"라고 말했어요. "가령 동물이 무서워 일상적 행동을 못하는 것을 보고 삐쳤다고 표현하면 주체인 동물을 탓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에 도움 되지 않는 관점"이라는 말을 덧붙였죠.


세로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감금’ 그 자체이지 외로움이 아니에요. 세로가 원하는 것은 스타성도 짝도 아닌 제대로 된 삶의 터전일 테고요. 더 이상의 피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부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당사자 중심으로 사건을 접근하는 미디어의 성숙한 태도를 볼 수 있기를 바라요.


혹시 독자님 중에서도 저와 같은 답답함을 느낀 분이 있다면, 세로의 탈주극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아래 댓글을 통해 견해를 나누어 주세요. 독자님이 느낀 그 마음, 같이 느끼고 얘기 나누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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