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점자 블록을 따라가보았다 | 배리어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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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노란 블록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노란 블록 사이에서 자전거를 타다 삐끗해 넘어졌을 땐, 한껏 짜증이 난 채로 대체 이 블록은 무엇을 위한 거냐며 성을 내기도 했다. 그 노란 블록이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었다.


어느 날은 집 앞 공원에서 산책하다 문득, 이 길에 점자블록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부서진 점자 블록이 잔뜩 보였고, 맨홀 때문에 중간이 끊긴 블록도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블록들 위에는 공유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들이 즐비해 있었다.


누군가에겐 유일하게 보일 노란 길을, 누군가는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고 눈에 띄는 색을 가졌지만, 모두가 보고 있진 않은 노란색 점자 블록. 문득 점자 블록을 따라 걷고 싶어진 나는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점자 블록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행표시로, 튀어나온 부분을 지팡이 등으로 감지해 길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점자 블록은 길게 나 있는 선형 블록과 작은 동그라미가 여러 개 박혀있는 점형 블록이 있는데, 전자는 '직진'을 의미하고  후자는 '위험', '정지'를 의미한다.


점자 블록이 노란색인 이유는, 안경이 깨지거나 렌즈를 잃어버리거나 정전이 되는 등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저시력자가 안전하게 보행하기 위해서다. 보도 색깔이 회색이나 검은색인데 점자 블록도 검은색이라면 눈에 띄기 어려우니까. 그래서 대부분 주변과 대비되는 쨍한 노란색으로 설치한다. 실제로 도로 안전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에 따르면, 돌출 부분을 포함한 점자 블록 전체의 색상은 원칙적으로 황색을 사용한다. 상황에 따라 노란색이 아닌, 바닥재 색상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색으로 할 수도 있다.



다시 노란 블록을 따라 걸었다. 플라스틱 재질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콘크리트로 된 것도 있었다. 부서진 것도 있었고, 맨홀에 가려져 끊긴 곳도 있었다. 한국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적색 블록은 충격과 압력에 매우 강한 고강도 제품이지만, 유도 블록은 콘크리트로 만들어 수명이 2년이 채 안 된다. 멀쩡한 블록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선형이든 점형이든 둘 다 모양이 분명해야 하는데, 부서지거나 다른 부분이 튀어나와 있으면 지팡이를 쓰는 시각장애인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는 길을, 누군가는 매 순간 긴장하며 걷고 있는 거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공유자전거와 전동 킥보드가 보였다. 좁은 인도에 킥보드가 군데군데 서 있으니, 보행자가 지나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점자 블록 위에 버젓이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큰 차가 인도에 주차해 노란 블록은커녕 길을 아예 막아 놓은 경우도 있었고, 공사장 근처는 점자 블록 앞에 벽이 쳐져 있어 위험해 보였다. 건설 자재들이 떨어졌는지 블록이 부서지고 길이 움푹 팬 곳도 많았다. 자전거를 타면 분명 넘어질 만한 길이었다. 아이와 어른, 휠체어에 앉은 사람과 반려동물 모두가 편하게 다녔던 길이, 언제서부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녀야 하는 길이 되었다. 멀쩡한 차도는 많은데 멀쩡한 인도 찾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킥보드 근처에 섰다. 옮길 필요가 없어 잘됐구나 싶었는데, 킥보드 하나에 사람 두 명이 올라탔다. 게다가 현행법상 전동킥보드는 인도 주행이 금지인데, 두 사람은 익숙하다는 듯 빠른 속도를 내며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갔다. 킥보드가 인도 위에 있으니 인도에서 운전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길이지만, 모두가 보는 건 아니다." 점자 블록을 따라 걸으며 든 생각이다. 멀쩡한 블록 찾기가 노후화된 블록 찾기보다 쉽지 않았고, 점자 블록 위에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란 점자 블록은 단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 엑시트에 나온 것처럼 연기가 자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탈출해야 할 때, 노란 점자 블록은 나가는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점자 블록만이 아니다. 지하철에 당연한 듯 있는 엘리베이터는 사실, 교통권을 보장받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인 이들의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공간들, 시설들은 사실 당연하지 않았다. 그러니 배제된 이들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두고 동참한다는 건, 나와 너, 모두를 위한 거나 다름없다.